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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가면

농어촌 지역 전형을 노린 기준의 엄마는 서울에서 한적한 시골로 이사를 결정한다.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기준의 전학 첫날, 운동화가 사라지고 원래도 언짢던 마음은 시작부터 어긋난다. 그러다 같은 반 친구 영준이의 형인 영문이 신고 있는 아디다스 슈퍼스타가 자신의 것이라고 직감한다. 하지만 엄마는 형제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압도적으로 느껴지는 형을 동경하면서 기준은 플레이스테이션을 자신도 모르게 갖다 주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동경에서 시작한 일탈은 계속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지만 기준 또한 그 방식을 답습하며 즐기기 시작한다. 딱 한 계절 동안 아이들은 각자의 세계를 하염없이 침범하고 파괴한다. 어떠한 낭만도 없이 찌르는 듯한 햇빛과 오래된 상가의 음습함을 담아낸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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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서 어른은 없다. 보호자로서도 동료 시민으로도 어떤 행동 없이 외면할 뿐이다. 그 사이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보호와 사랑 없이 위계와 폭력에 민감해지고 아이들 사이에서 그 체계를 쌓아나간다. 마을의 어른들은 아무런 보호 체계 없이 생계를 이어 나가는 아이들을 그저 어른스럽다는 말로 포장하고 방치한다. 담임 선생님조차도 문제가 생겼을 때 영준을 찾을 뿐 도움을 주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특히 기준의 부모는 영문의 시공간을 어지럽힌다. 당연하다는 듯 집에 찾아와 용돈을 건네는 아빠. 멀끔한 브런치 카페에 영문을 앉혀두고 자신의 아이와 놀지 말라고 하려는 엄마. 그들이 숨긴 너와 나를 나누는 강력한 선이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영문은 그 규칙에 누구보다 익숙하다. 아이는 자신이 상처받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다. “기준이랑 놀지 말라고요?” 영문이 아는 것들은 어떤 어른보다도 더 많이, 빨리 깨우친 것들이다. 오토바이로 치킨을 배달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이 아이는 어느 방향으로든 자랐다. 경험을 쌓으며 어떤 또래 관계를 맺고, 어떻게 어른들 앞에 띄지 않을지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의 답이 폭력과 회피였을 것이다.

영문은 어른들 앞에서 누구보다 잘 숨는다. 치킨집 전단을 붙이다 기척이 나면 후다닥 계단으로 숨는다. 또래들에게는 무서운 형이지만, 가족들이 모인 운동회에서는 쪼그려 앉아 신발 끈만 하염없이 쳐다본다. 기준의 엄마가 처음에는 영문을 동정하다가 아이가 달라지자 바로 분리해야 할 존재로 인식하며 적대적으로 구는 경험을 이미 영문은 여러 번 겪었으리라. 하지만 우리 아이는 억지로 떠밀렸을 것이라는 어른들의 바람과 달리 아이들은 훨씬 맹랑하고 적극적으로 서로의 문화를 따라 한다. 그러니 영문이 기준에게 주는 영향만큼이나 기준이 오고 아이들에게 준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들만의 규칙을 체득하며 살아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견딜 힘과 기회가 영문에게 있었을까. 우리 애는 아니라며 읍소하는 어머니를 둔 아이와 어른들 앞에서 그림자조차 숨기며 자란 아이에게 정말로 동일한 잣대를 들이밀 수 있을까. 폭력을 과시하고 힘겨루기를 멈추지 않는 아이들 사이에서 정말로 영문에게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수많은 질문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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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준은 형에 비해 해맑은 구석이 있다. 조이스틱을 외출할 때도 가지고 와 연습한다며 까불거린다. 학교에서도 웃음이 삐져나온다. 그래서 형제의 대비는 그들의 과거와 미래를 상상하게 하게 만들고 곧 현실이 된다. 기준이 다시 마을을 떠나는 날, 체육대회가 열린다. 아동 센터의 허락을 받아 축구 시합을 하러 가던 영문과 영준은 기준이네가 버리고 간 것들을 뒤지다 플레이스테이션 박스를 발견한다. 박살 난 것을 겨우 돈을 마련해 돌려준 그 게임기다. 영문은 욕을 읊조리며 박스를 챙긴다. 오토바이가 고장 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사내려 애쓴 마음이 비참함과 분노로 가득 찬다. 동시에 영준은 발로 땅을 툭툭 차며 말한다. “(아이들이) 내 안 좋아하는 것 같다.”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직접 말하는 동생에게 형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게 느껴진다. 형제는 더 이상 축구를 하지 않기로 한다. 따가운 볕 아래에서 축구하는 여름이 그들에게 돌아올까. 아마 아닐 것이다. 플레이스테이션을 마음껏 하던 여름은 유독 더 짧게 지나가버렸고 아이들은 못 하는 것보다는 안 하기를 선택한다.

영화 내내 아이들은 밖에서는 축구를 하고, 안에서는 축구 게임을 한다. 본격적으로 영문과 기준이 얽히는 일도 공을 차다 기준이 실수를 해 생긴다. 또한 유일하게 영문이 다수의 또래와 어울리는 모습은 축구가 유일하다. 사춘기를 앞둔 아이들에게 축구란 자신의 운동신경을 뽐내면서도 아닌 친구를 배척하기도 하는 잔인하고 원초적인 게임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상처받은 아이는 더 이상 축구를 하지 않는다. 영문과 영준이 축구를 하지 않기로 한 건 그냥 놀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순수함이나 기대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둘은 어디론가 떠난다. 암전이 된 상태로 그 소리만을 쫓으며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다음 여름을 기약해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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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름,

장병기 감독은 이 이야기가 성장이 아닌 무너짐을 말한다고 소개한다. 아이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가 무너짐을 경험한다. 기준은 서울에서 시골로 전학을 오며 적응하지 못하고 폭력에 노출된다. 다시 서울로 돌아간 후에도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자신을 느낄 것이다. 다시 평안하고 멀끔한 궤도 속에 안착한 기준에게도 어쩌면 이 여름은 이상하게 남을지도 모르겠다. 영문과 영준에게는 그 감정과 시간이 좀 더 오래 갈 것 같다. 무관심한 어른들과 다른 세상을 사는 것만 같은 기준을 보며 느낀 미묘함. 해맑던 영준이 다 나를 안 좋아한다며 축구를 하지 않겠다는 그 날. 동시에 기준이 마을을 떠난 그 날. 형제의 세계는 한 번 더 무너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린 시절 느꼈던 아이들의 서늘함이나 형언할 수 없는 위계들이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아이들 중 누군가를 나쁜 아이라며 낙인찍을 수 없었다. 기준이가 영문에게 맞은 외상보다 어쩌면 기준이 쓸고 지나간 자리가 영문이와 영준에게 더 짙게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상처의 크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해지는 것이라 영화를 보는 내내 울대가 묵직해졌다. 이들의 여름도, 청소년기도 분명 지나가지만, 그것들이 지나가기만 하면 견딜 수 있고 잊히는 것들이 되었던가. 어떤 것들은 지날수록 생생해지기에 다 지나간다는 말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아이들의 상처가 아이들로부터 시작되고 끝났으면 하는 환상을 가진다. 서로 할퀴고 때리는 것만이 그들의 상처였으면 한다. 그들이 화해하지 않고 서로 미안해하지 않으며 욕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렇지 못하는 현실 속 미묘함이 담겨있다. 어릴 적을 생각해 봐도 그런 걸 귀신같이 알았다. 또래 집단에서 가장 먼저 습득하는 건 너희와 우리를 나누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 아이들이 주고받는 모든 종류의 폭력이 이야기가 아닌 진짜로 느껴져서, 그 기분을 너무 알 것 같아서 숨이 막혔다. 정문에게 아디다스 슈퍼스타 235 사이즈가 작아졌을 때는 그 신발을 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새 신발을 사주고 싶은 모순을 느끼며 할 수 있는 유일한 응원은 그들 또래였을 때 느낀 감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절대 지나가지 않는 그 감정들은 결국 끈적하게 남아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든다고. 그러니 그 감정을 충분히 표출하고 집요하게 쫓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영화는 질색이다. 가해자가 가해자로 남고, 피해자는 고이고 고여버리는 그 잔혹함이 견디기가 힘들다, 하지만 여름이 지나가면은 아이들의 무너짐을 낱낱히 보여주면서도 그들의 미래를 상상하게 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최소한 영문이 모두를 노려보고 욕할 수 있는 아이라는 것. 기준 또한 영문의 밥 뭇나라는 질문에 파르르 떨던 그 밤을 두고 두고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떤 종류의 폭력은 가해와 피해의 양상을 똑 잘라낼 수 없는 감정의 골일지도 모른다. 절대 메울 수도, 해체할 수도 없는 것들이 들러붙어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그게 우리의 여름이자 마음 속에 있을 영문과 기준의 모습일 테다. 햇빛에는 눈이 따갑고, 스산함에는 소름이 끼치는 이 여름이 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