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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되는 삶

최근 역사 드라마에 빠지면서 오랜만에 자발적인 공부를 했다. 만화, 기사, 책 할 것 없이 풍성하게 읽고 나름대로 소화해 보며 공부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궁금증으로 시작해 배움을 채워가는 그 모든 과정이 공부하는 삶이구나 하며 계속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과정을 통해 찾아가는 그런 것. 그러다 정희진 작가의 글이 떠올랐다.

공부에 해당하는 한·중·일 한자는 각기 다릅니다. 한국어는 ‘工夫’, 중국어는 ‘学习’, 일본어는‘勉强’이죠. 저는 우리말이 공부의 의미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工’은 ‘노가다’라는 의미이고, ‘노가다(工)를 하는 사람(夫)’은 노동의 달인을 의미합니다. ‘공부’의 기원은 정확지 않지만, 도올 선생에 의하면 옛날 옛적 중국에 물을 나르는 이가 있었는데, 두 개의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 나르는 일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물이 찰랑거리고 대부분을 흘리고 말았죠. 그러나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빠른 걸음으로 한 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고 날랐다고 합니다. 물 나르기가 몸의 일부가 된 것이죠. 이것을 우리는 “공부가 몸에 배었다”고 합니다. 체현된 것이죠.

공부는 어부, 광부, 농부와 같은 항렬입니다. 즉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노동의 달인이죠. 그래서 공부는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工夫)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부, 광부, 농부처럼 공부가 되는 삶을 살고 싶다. 공부가 되려면 열렬하게 공부해야 한다. 나에 관한 공부든, 하고 싶은 학문이나 일에 관한 공부든 매료되는 감정을 느끼며 몰입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삶을 꿈꾸며 정작 그런 경험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시험에 닥쳐 허겁지겁 정보를 머리에 넣기 바쁘고, 어떤 자격을 갖추기 위한 학원에 다니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게 체현되는 공부와는 멀어진다. 우리 사회가 규정하고 행하는 교육도 그와 가까운 정적인 공부다. 채운다기보다 앉아 머리에 정보들을 밀어 넣는 방식이다. 그 방법은 종종 폭력적이다.

이런 생각의 끝에서 극단적으로 어떤 공부든 직접 경험하는 것 외에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전공이나 학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일을 하며 배우는 것만 나를 가치 있게 하는 일이라 여겼다. 그렇게 투잡, 쓰리잡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3개월 동안 인테리어 현장과 사무실에서 일하며 느낀 게 있다. 지식과 실천을 합치는 것이 공부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책상에서 생각해도 적용하지 못하면 그 배움의 다른 의미를 생각하기 힘들고 현장 역시 앉아 생각하고 점검할 시간이 필요하다. 한쪽 뇌만 사용하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배움과 실전은 분리할 수 없고 오히려 함께 할 때 풍성해진다. 바삐 돌아가는 책상에서의 일이나 현장 사람들의 결국 해낸다는 우직함이 내게는 둘 다 감동스럽다. 블루칼라, 화이트칼라로 나누어지는 범주 또한 내겐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앉아 있는다고 공부가 아니고 움직인다고 공부가 아닌 것도 아니다.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공부가 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그 순간을 포착했을 때 비로소 나는 공부를 잘하고 싶어졌다.

왜 공부하는가 – 김진애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즐거운 기억도 많지만, 국어, 영어, 수학 같은 교과목 외에 세상을 공부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에 내심 아쉬워진다. 어리다고, 학생이라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다는 여러 이유로 배제되고 의기소침해지는 경험들이 학생을 가르침 ‘받는’ 사람으로 만든다. 교육은 모두를 개선하려고 한다. 공부를 못 하는 아이의 성적을 올리고 잘하는 아이는 잘 유지하며 모두를 우상향 곡선에 올리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그럴 수는 없기에 괜찮아, 잘될 거야! 라는 외침은 너무 상투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생각과 함께 공부는 왜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질문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 지겨울 만큼 익숙하다. 공부의 의미는 넓어져도 정작 고민 자체는 멈추지 않는다. 대학교 입학을 위해 빡빡하게 보내는 학창 시절이 이해되지 않았고 의문스러웠다.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공부를 잘하면 우리는 뭐가 되나? 그때와 상황은 다르지만, 느껴지는 것들은 비슷하다. 다만 이제는 공부하는 이유가 아닌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어떤 삶을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고민으로 뻗어가고 있다.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책이 고등학생 시절 눈에 띄었다. 아마 당시 필요했던 건 정확한 답이 아니라 나와 함께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왜 공부를 (잘) 해야하는지, 왜 대학을 가야 하는지는 내가 해결할 문제일 뿐 책은 그저 내게 질문의 범위를 넓히고 좁히고 파고들게 했다. 책을 펼쳐 밑줄을 그어댄 흔적을 오랜만에 열어 훑어보았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우리에 의한, 우리다운 공부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까? 이 문장에 줄을 긋고 큼직한 포스트잇을 붙여두었다. 여전히 와닿는 질문이지만 지금 내게 와닿는 구절은 따로 있었다.

사회와 역사를 조감하는 통찰력으로 사회갈등에 대해서 따뜻한 가슴으로 공감하고, 그러나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머리를 갖고, 열심히 세상과 소통하고, 현장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희망인가?

이런 희망이 이어져 미래에는 마땅한 답을 내놓는 어른이 될 거라 꿈꾸던 시간이 있었다. 현재의 나는 여전히 답을 찾아가는 길에 있지만 마냥 꿈을 꾸기보다 정말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실천하려 애쓴다. 비록 책을 몇 번씩 뒤적거리며 멋진 모습을 상상하던 과거의 내게는 흡족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여정이 무엇보다 가치 있다고 믿는 현재의 나는 오히려 고민에 대한 힌트를 얻으며 책을 덮었다.

공부가 되는 삶

지난 주에 집 정리를 하다 중학생 시절 모아둔 영화 포스터들을 찾았다. 몇 장 넘겼을 뿐인데 학교 도서관에서 족구왕 DVD를 빌려본 날, 독립영화를 검색창에 찾아보며 이 영화를 봐야지 써 내리던 방과후, 동네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책과 영화를 뒤적이던 여름방학, 다큐멘터리가 잘 녹화되었는지 몇 번씩 확인하던 시간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뚜렷하게 기억하는 배움들 역시 누군가 가르쳐 준 것들이 아니었다. 윤동주의 서시를 외우던 순간, 처음 독서모임을 가던 발걸음, 함께 생각을 나눈 첫 경험, 물건을 고치다가 망가뜨린 일들...감수성을 키우고 자기만의 입장을 설정해보고, 타인에게 공명하게 되는 경험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보면 공부가 되는 삶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대학 안과 밖을 넘나들며 몇 년이 지났다. 최근 나는 다시 대학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앞으로도 생각의 심지를 유지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누군가의 강요와 규범에 따르지 않고 필요한 시점에 학교를 가겠다는 목표까지의 여정이 충분히 기쁘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나에게도 사회에도 있다고 굳게 붙들어 가면서 종종 결정에 후회와 고민도 하면서 살게 되겠지. 내게 공부는 그 자체로 대안의 삶을 찾아가는 태도다. 공교육 체계에서 열심히 규범을 지키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던 학생에서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가는 길은 점점 더 꼬불거리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매순간 스스로 증명한다. 어른이 되어 가장 좋았던 것은 다른 사람들의 세상에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도 하고 다양한 방식을 시도해볼 수 있던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살지도 않고, 각자의 방식대로 공부가 되고 있다고 상상하면 나는 어떤 공부가 될 수 있을지 기대하게 된다. 여전히 헤매고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방황이 아니라 모험이라는 단단함을 취하는 삶이 되길 스스로 격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