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붙들어야 할 게 있다. - 영화 세입자
먹고 살기도 팍팍하지만 살면서 챙겨야 할 것들이 많다. 월세, 관리비, 공과금, 경조사, 건강, 스펙…. 이 많은 것들을 챙기며 살아가는 우리와 영화 세입자의 세계는 다르지 않다. 심각한 공기질과 허약한 경제기반으로 인한 극심한 빈부격차로 설명되는 디스토피아는 끔찍하겠다는 타자화보다 먼저 공감이 되는 익숙함이다. 다만 영화에서는 월월세라는 한 가지 요소를 추가한다.
주인공 신동은 조카 뻘 집주인에게 리모델링을 할테니 나가달라는 말을 듣고 친구에게 하소연한다. 그에게 친구는 월월세, 즉 집의 일부를 다른 세입자에게 월세를 주어 계약 관계를 모호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다음 날 신동에게 찾아온 기이한 신혼부부는 거실도 아닌 화장실에 머무르겠다며 계약서를 내민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퇴거를 재촉하는 집주인의 연락에 덥썩 결정을 해버린다. 문제는 그때부터였을까. 신혼 부부는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고 안전하고 편안해야할 집은 그야말로 남의 집이 되어 버린다. 물건이 없어지고 이명이 들린다. 조금 더 설정이 추가되었지만, 이것 또한 우리 사회에서 흔히 경험하는 일들이다. 집답지 않은 집을 공급받고, 부실 공사로 층간 소음과 벽간 소음을 감수하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현실과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적당히 버무려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불편함들을 꼬집는다.
신동은 계속된 스트레스와 싸우며 신도시 파견을 꿈꾸던 무렵, 월월세 부부가 천장 공간에 세입자를 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제야 친구가 넌지시 말했던, 자신은 무시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를 위한 제도는 없어.” 천장세는 소위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을 천장 공간에 주거하게 지원하고 집주인에게도 120%의 혜택을 주는 기이한 제도이다. 물론 신동 본인도 월월세를 주어 강제 퇴거를 피할 수 있었지만, 제도의 의도된 취약함은 그 다음 약자인 신동에게 한 방을 날린다. 이 지난한 스트레스 속에서 머리가 아픈 건 세입자들일 뿐 어린 집주인은 이런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천장세는 주인-월세-월월세로 이어지는 낙수 구조 같아 보이지만 정작 온전히 이득을 얻는 것은 주인뿐이다. 타인과 집 일부를 나누어 삶의 질이 하락하는 것에 더해 신혼부부가 천장세를 준 사례처럼 상황이 복잡해진다면 해결할 방도가 없다. 천장세는 일단 막고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돌아갈 수 없어지는, 잘 설계된 올무다. 하지만 사회는 죽을만큼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는 말로 약자들의 삶을 일축하고 구성원들 역시 저렇게 되지 않아야 한다는 두려움과 혐오감을 서서히 키워간다. 피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계급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천장 인간들을 분류하면 할수록, 나보다 잘 사는 혹은 못 사는 모습을 가늠하고 끊임없이 재현 할수록 결국 인간을 한 계급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에 갇혀버릴 것이다.
신동의 친구는 그런 사회의 비극을 보여준다. 그가 어쩌다 천장 인간이 되고 결국 죽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죽음을 예견한 메타포들에서 이미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이 그들의 노력과 관계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친구 신동조차 그가 왜 늘 쪼그리고 있었는지,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조차 알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영화 속 디스토피아는 급격하게 병들어 보인다. 친구의 죽음을 제도 개선을 위한 재료로 쓰겠다는 공무원의 말에도 어떤 감정적 동요도 없는 신동은 본인도 모르는 새 죽어간다. 친구가 죽고 난 후에도 신동은 여전히 열심히 일한다. 파견을 가기 위해 야근을 하고 옆자리 대리의 서류를 바꿔치기하며 경쟁자를 제거한다. 그런 노력 덕분일까? 그는 명단의 마지막 순서로 신도시 파견에 합격한다.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드디어 이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들어간 천장에서 그가 마주한 천장 사람의 얼굴은 본인, 신동이다. 그가 미친 걸까? 아니면 신혼부부의 계략에 당한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신동은 자신의 상상 속에 살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십여 분 동안의 혼란스러운 장면들은 앞서 나온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도 가장 막장을 다룬다. 차라리 지하철에 실려 야근하고, 초췌한 얼굴로 잠만 자던 신동의 삶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모든 게 꿈이라면, 혹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나아지는 걸까.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 만하게 사는 건 허상인 걸까, 끝없는 생각이 피곤하게 몰려온다. 영화는 풀리지 않은 이야기 끈을 뭉쳐놓은 채 끝난다.
영화 속 세계관은 꼼꼼히 뜯어볼수록 서글프다. 이명으로 방문한 이비인후과에서 동민이 심리적인 문제를 일컫자, 정신과 비용으로 넘어간다고 알려준다. 지하철에서는 동민이 그렇게 갈망하는 푸른 바다가 있는 신도시를 타깃 광고한다. 동민이 사는 도시는 심각한 공기질로 모든 집에 공기 순환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지만 신도시에는 대기 오염을 더 촘촘한 기술로 막아낸다. 기술 발전의 수혜는 꼬리까지 오지 않는다. 어쩌면 제도와 혜택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들은 그들의 삶을 연장해 영원히 노동 계급에 머무르게 만드는 족쇄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한 고민 상담 프로그램에 한 청년이 등장했다. 소년 가장인 그의 고민은 일을 하면 기초생활 수급 지원이 끊긴다는 것이었다. 두 남자 진행자들은 ‘한심한’ 청년에게 ‘어른으로서’ 타박했다. 그 방송 클립을 보며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기초생활 수급을 받는다는 건 수많은 기준을 거쳐 최소한의 생계를 지원받는 복지 수단이다. 하지만 제도의 맹점은 청년의 고민 그 자체다.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의 생활을 함께 이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매일 일하는 건 오히려 위험 부담이 크다. 일을 하고 싶어도 당장 필요한 만큼의 돈을 벌기 어렵고, 혹시라도 다치거나 일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최소한의 숨만 쉬며, 차라리 일을 안 하는 게 합리적인 결과로 도출되는 것이다. 이건 개인의 나약함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그렇기에 방송은 단순한 인과관계만을 도마에 올릴 것이 아니라 최소한 그 속에 있는 제도의 허점 또한 포착했어야 한다.
신동의 친구가 말한 “숨만 쉬며 살라는 거지”라는 대사가 앞 전에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 속 비극이 분명 우리 사회에도 실존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 자주 알게 된다.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일관하고 있으나 그건 우리 사회와 영화 속 사회를 미러링하기 위한 도구일 뿐, 이 영화는 허구의 탈을 쓴 사회 고발 르포 같다. 주거 문제, 환경 문제, 빈부 격차, 개인주의 같은 사람들이 굳이 따지고 싶지 않은 것들이 우리를 더 잘 설명한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 지점을 발견하며 다소 불쾌할지라도 영화가 보여주는 냉정함의 의의를 생각한다.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진실을 마주보게 하고, 외면하기 힘들게 만드는 힘 같은 것 말이다. 비극적인 세상을 묘사하는 영화 세입자의 건조한 시각은 오히려 직면할 담담함을 키워낸다. 그것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존엄이자 마지막 자존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