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12시 라디오
고등학생 시절, 느리게 살고 싶었다. 스마트폰 세대지만 구태여 폴더폰을 쓰고, MP3로 노래랑 라디오를 들었다. 당시에는 라디오를 그냥 습관처럼 들었던 것 뿐이지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고 싶지 않은 밤마다 심야 라디오를 들었다. 지역 방송의 심야 라디오는 익숙한 전화번호 뒷자리들과 사연으로 구성됐다. 뒷번호 4자리만 아는 이의 사연이 익숙해질 즈음 그가 어떤 사람일지 상상했다. 듣고 있는 우리가 연결된 듯한 순간을 좋아했다. 내 문자가 읽히길 기다리던 순간의 마음은 어땠던가.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모든 걸 말하고 싶은 마음이 매일 충돌하던 시절 보낸 문자들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약효가 있었다.
내가 쓰던 라디오는 노랑색 선풍기에 붙어 아주 허접했지만 그 선풍기를 곁에 두고 보낸 모든 것이 조용해지는 시간에는 딱 적당한 완성도였던 것 같다. 너무 근사하지 않아서 추억이 되는 것도 있었다. 이 년 정도가 지나 선풍기 모터가 딱딱 거리고 멈췄을 무렵부터 라디오를 잘 듣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가끔 그리운 날에는 학교에서 가끔, 집에 오는 버스에서 가끔 라디오 어플을 들어봤지만 쨍한 진행자들과 패널들의 웃음 소리에는 영 주파수가 동하지가 않았다.
다시 두 번의 여름이 지나고서 오랜만에 12시 라디오를 떠올렸다. 즐겨 들었던 지역방송이 폐업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마지막 인사와 함께 삐-하는 수신호로 끝나버렸을 시간. 연결됐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도 라디오를 듣고 있을까? 가끔 자정의 99.9mHz를 생각할까?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쫓다 나 또한 그 시간과 영원히 멀어졌다는 것을 느끼고 슬퍼졌다. 라디오는 내 청소년기의 극히 일부이지만 그 시간이 만든 뿌리는 여전히 단단하다. 그렇기에 과거의 나를 솎아내고 지금의 나로 옮겨 심어진 기분에 아쉬움을 느낀다.
이문세가 새로운 라디오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오랜만에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듣기 시작한 라디오는 왜 라디오를 들었는지 되새기게 했다. 하나의 목소리로 모두가 연결되는 감각. 라디오를 다시 듣기 시작하고서 그 심야 라디오들을 다시, 자주 떠올린다. 돌아갈 수 없는 밤들을 채워주고 재워준 모든 연결들에게 마음을 띄워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지는 게 아니라 함께 같은 시간에 공전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동네 도서관을 언덕길로 돌아가거나 골목 사이에 멈추어 설 때가 요즘 일상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고 자주 행복한 순간이다. 언제나 살아 숨 쉬고 있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정말로 느끼는 순간은 나의 속도를 내가 만들어 갈 때이다. 세상의 속도에 맞추는 시간을 마치고 천천히 걸어가는 시간을 참 좋아한다. 이 간극은 그 시간이 서로 필요함을 알게 해주고 감각을 풍성하게 만든다.
천천히 산다는 건 상대적인 감각이다. 라디오를 듣던 고등학생의 나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일상의 간극처럼. 한 발짝 뒤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 가까워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가까워져 보고 싶다. 세상을 조금 더, 면밀히 관찰하고 참여하고 싶다. 길은 좁아졌다가도 넓어지고 사람은 쪼그라들었다가도 팽팽해진다. 나의 쪼그라들었던 마음은 조금 펴졌고 라디오가 그런 힘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심야 시간의 라디오. 서로를 모르지만, 아는 듯 착각하게 되는 그 시간을 계속 그리워하면서도 지금의 삶에, 내일의 라디오에 기대어 보는 것. 그게 살아가는 과정 아닐까.
삶에 대한 호기심과 엿보고 싶은 욕구, 이 마음이 어디까지 커질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이렇게 번져갈 수 있다면 좋겠다.(2024.7)